성찰의 의미
자신이 한 일을 깊이 되돌아보고 '자기의 마을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를 올바로 인식하고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가족, 직장, 친구 등 주변 관계와 복잡하게 얽혀서 파편화되어 있다. 그 파편화된 조각들을 다 모은다고 해서 나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역할과 관계 속에서 나는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의 생각과 마음은 부단히 움직이고 변화한다. 따라서 가면을 벗은 나의 모습을 대면하고 통합하는 시간을 자주 가짐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관찰'과 '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나의 행동과 마음은 주체인 자기 자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환경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성찰을 한 다음에야 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세상 속의 자신에 대한 성찰은 다시 세상에 대한 넓은 통찰과 통하게 된다.
성찰적 글쓰기와 그 효과
글쓰기는 '나'의 파편화된 상황을 자각하고 관찰과 성찰을 토대로 자아 통합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글쓰기 자체가 사고의 과정이자 자기 확인과 표현, 그리고 문제의 인식과 해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느낌과 사유의 변화 과정을 그대로 확인하고 기록할 수 있다. 내면의 기록은 자신은 문제를 좀 더 깊고 넓게 정리하고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 과거와 미래의 문제에 접근하고 예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통해 불유쾌한 감정을 털어 내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효과도 준다. 그 무엇이 되었든 지속해서 글을 쓰게 되면 어려울 때나 위기에 빠질 때 글을 통해 탈출구를 찾게 될 것이며, 글을 씀으로써 감정을 정화시키고 기분이 편해지며, 나아가 생활의 한 단면이나 고통스러운 면까지도 부인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한 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 자신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의 특정한 부분들을 이해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내부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를 중요하게 인식함으로써 자의식이 생기고, 내가 경험한 것을 글을 써서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자신에 대해서, 또 자신의 갈등과 욕망에 대해서 투명해지고 솔직해짐으로써 인생을 더 확실하게 설계할 수 있다.「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 - 슈타이니케 (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사적 경험에 대한 충실한 성찰과 자각을 담은 글쓰기는 때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깨달음을 줄 수 있다.
나는 삼 년 반 동안 고령의 병든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사그라져 가는 육체의 추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내 속에 생생하게 자국을 남기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 자국들은 아버지가 흙에 묻힌 뒤에도 아무런 신호도 없이 재현돼 나를 괴롭히곤 했다.
밥을 먹을 때 우연히 내 입에서 나는 후루룩 소리가 또렷이 의식되면서 아버지가 식사하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오른다거나, 혹은 늦은 밤 불면으로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당기고 모로 누울 때, 아버지 역시 이런 동작으로 힘겹게 돌아 누웠었는데 하는 기억과 그 감각이 내 몸에 생생하게 떠오는 식이었다.「이상운,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소설가 이상운의 이 다큐 에세이는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여 쓴 아들의 '적나라한 내면의 기록'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육체의 고통은 저자의 감각과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죽어 가는 아버지의 육체적 고통과 추한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또 간병하는 자신의 내면은 더욱더 숨김없이 기록하였다. 이 에세이는 이러한 성찰 과정을 통해서 가족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 상상하고 이 문제와 관련한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해 절실히 물어야 한다는 자각을 향한다. 이 경우처럼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 과정에서 세상을 조망하고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면 사회적 소통을 의식한 글을 완성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성찰적 글쓰기는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삶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한 가장 높은 차원의 사유 과정이 될 수 있다.
성찰의 계기와 소재의 발견
자기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성찰을 위해서는 꾸준한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지면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을 새롭게 들여다볼 계기를 일부러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쉬운 것은 타인과의 만남이다. 대화를 통해서 상대를 둘러싼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관심이 있다면 더 다가갈 기회를 만날 수도 있다. 독서는 가장 훌륭한 성찰 도구이다. 어떤 종류의 책을 읽든 천천히 시간을 두고 타인의 삶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하다. 관심이 있는 강연을 듣거나 전시회나 무대 공연을 보고 예술적 감응을 경험하는 일, 낯선 도시나 지역으로의 여행, 계획 없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산책하는 일, 낯선 환경을 관찰하고 일상을 벗어나 나를 마주하는 일, 때로 불확실한 상황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기회가 된다. 그 어느 경우이든 머리에 떠오른 느낌과 생각의 변화를 온전히 기록해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변화를 찾아 외부로 나서는 것이 어렵다면 새로운 상상과 가정을 하여 성찰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면, 새로운 가족원을 맞이하게 되어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먼 길을 떠나게 되어 가족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겨야 한다면,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에 남긴 것들을 모두 정리해야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새로운 상황에 대한 가정은 미뤄 두었던 과거와 주변을 정리하고 미래를 예비할 수 있도록 자극할 것이다. 미리 써 두는 유서는 무엇보다 한계상황을 맞이하여 자기 안의 어두운 면까지를 모두 받아들이고 반성하며 인생을 겸허하게 살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물론 이때도 중요한 것은 그 느낌과 생각의 변화를 글로 옮기는 일이다.
새로운 외부 자극이나 가정 외에도 참신한 소재의 활용이나 글쓰기 방식의 변화를 통해서도 성찰적 글쓰기를 시도할 수 있다. MBTI나 에니어그램 같은 다양한 성격유형검사 결과에 대한 자기 점검이나, 나에 대한 누군가의 평가자료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감상과 분석을 쓰는 일은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여 글을 쓰거나, 사물이나 동물에 비유하여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도 나의 특성과 장단점을 살펴보고 객관화시키는 일이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의 발견과 혹은 소중한 물건의 순서를 정해 보는 일,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을 기억하고 그 이유와 작은 사건들을 떠올려 보는 일, 나에게서 멀어진 사람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도 성찰의 계기와 소재가 된다.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의 관계망을 꼼꼼하게 그려 보는 것이나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쁘고 슬펐던 일, 성취와 실패의 부침을 그래프로 그려 보는 것도 나를 알고 알아가는 흥미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탐색을 가능하게 한다. 유년기를 보낸 지역과 학교, 누군가를 만났거나 어려운 일을 겪은 장소를 떠올림으로써 침장된 다른 기억을 찾아낼 수도 있다.
관찰과 성찰의 대상이 되는 소재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것일 수도 있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드시 특별한 체험만이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친숙한 소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넓어진다.
나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음식을 만들지, 포만감을 느낀 후데도 타락한 미뢰를 자극해 건강에 안 좋은 것을 포식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배가 부르면 그걸로 충분하며, 그 정도가 과식하는 것보다 이롭다. 과식하면 병이 나거나 비만해지니까.
음식이 입맛을 돋올수록 더 많이 소비되고, 건강에 더 해롭게 된다. 날씬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식사량을 줄이라고들 한다. 버터와 소금을 뿌린 팝콘은 뿌리지 않은 팝콘보다 두 배쯤 더 먹게 된다. 그런데도 굳이 버터와 소금을 뿌릴 필요가 있을까? 아무것도 안 뿌린 팝콘을 적당량 먹다가 그치면 될 일이다. 소금을 넣지 않은 샐러드가 입맛을 당기지 않는다면 그만큼 배가 고프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굳이 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극적인 양념을 넣지 않고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소금과 양념이 음식을 더 많이 먹게 만든다면, 소금과 양념을 넣지 말고 음식을 적게 먹는 편이 좋다.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헬렌 니어링, 내가 요리책을 쓰게 된 사연」
입맛을 돋우는 양념을 적게 넣어 요리하라는 저자의 제안은 미식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독특한 시각과 참신한 발상의 기저에서 우리는 '함께하는 삶'에 대한 통찰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대로 참으로 간단한 삶의 방식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인간이 지닌 잉여적 욕망과 감각적 지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요리법에 대한 간단한 제안이지만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담고 있어 독자에게 감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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